[ 아리 칼럼 ]
아련한 과거의 편린(片鱗)
-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퇴근하고 밤 늦게 집에 돌아왔다. 온종일 목을 감싸고 있던 넥타이가 갑갑하게 느껴진다. 현관에 들어서자 문수가 다른 아이들 신발이 놓여있다.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박목월, 「가정」)라고 속삭여본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반복에 함몰되어 가는 듯하다. 그저 아내와 아이들을 보며 견디는 삶일 뿐이다. 원래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고 그 때는 기개 넘치게 노래를 불렀다. 이제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그 시절이 내게는 마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멋진 말이다! ‘옛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아련함과 애틋함을 준다. 그런데 여기에 ‘희미하다’와 ‘그림자’가 더하여지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이 단어를 듣는 순간 과거로 이끌려가는 마력이 있다. 1969년 우리나라의 블루벨스라는 남성중창단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불러 널리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 제목을 김광규가 가져다가 시의 제목으로 쓴 것이다. 시는 전체가 하나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는 자유시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19행이다. 4․19가 나던 해 우리는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토론의 주제는 아마 자유와 정의였으리라. 시에서는 그 주제가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이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결코 그것을 ‘어리석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며, 혈기와 순수로 응집된 이상이었다. 어리석음을 젊음의 낙관성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이 단어는 중의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뜨거운 청춘들은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이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였다. 그렇기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19행을 보면 좋지 않은 느낌이 든다. ‘별동별이 되어 떨어졌다’고 한다. 왜 하늘에서 계속 빛나는 것이 아니라, 떨어진 것일까? 젊은 날의 열정과 순수가 사라지게 될 것을 암시한다.
둘째, 20-37행이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 1960년에 4․19가 일어났으니 이제는 약 1980년쯤이고, 이들은 40대 초중반이 됐을 것이다. 현실에 안주해버린 기성세대로서 이제는 혁명이 두렵다. 안부, 월급, 물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앞과 대조적이다. 젊은 시절의 ‘열띤 토론’이 없는 소시민들의 ‘떠도는 이야기’의 장을 보여준다.
셋째, 38~49행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부끄러운 마음을 고백한다. 45행에서 ‘부끄럽다’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만, 이러한 감정의 시작은 38행부터 시작되어 이어진다고 보았다.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고개를 떨군다. 왜냐하면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우리가 대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라졌고 옛사랑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옛사랑을 생각하면 문득 그립고 슬퍼지기는 하나, 지금 현재 처자식의 생계를 위해 사노라면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다. 핑계라고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렇다. 물론 이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고 중년의 건강을 걱정해야할 나이다.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는 바람의 속삭임은 못 들은 채하고, 늪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적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곳에 발을 딛고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옛사랑을 조금 더 추억해보겠다. 그 때는 그대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시 「소」를 보면,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왜 뿔이 있으면서도 왜 가만히 있느냐고 열변을 토한다. 또한 그의 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그는 헛되이 사라지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힘차게 말한다. 우리의 옛사랑을 향한 태도가 이러했다. 불의를 보지 못하고 소리치며, ’아니다‘라고 말할 줄도 알았다. 즉, 옛사랑이 무척 소중했기에, 푸른 젊음의 열정과 기개로 이를 적극적으로 지켜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으면서 대안이 없다고 비판할 수 있다. 화자는 현실에 안주하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리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이와 같은 종결 방식에서 중년 소시민의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내적 갈등은 일편적인 반성과 고민으로 끝날 뿐이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한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대안을 제시한다면 자칫 사회주의 문학으로 흘러갈 수가 있다. 다시금 성찰하게 하고 지난 젊은 시절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의의가 있다.
주목해야할 특징으로는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우리’이다. ‘나’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고 ‘우리’라는 단어는 8번 나온다. 4·19 세대 모두가 부끄러움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나’라는 개별 화자 대신 ‘우리’라는 공동의 화자를 내세웠을 것이다. 이를 통해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감이 소실되어, 독자까지 우리의 하나로 흡수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더 나아가 굳이 4․19 세대가 아니더라도 삶의 순수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독자 모두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지평을 열어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젊은 시절과 그로부터 18년 후를 대비하며 성찰하는 내용이다. 김광규의 시는 난해하지 않다. 쉬운 일상어로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 들고 세월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젊은 날에 대한 향수와 회한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렸고 약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애송한다. 이 시는 1979년 발간한 첫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도 계속해서 지난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문득 그리워질 것이다. 과거의 편린이, 옛사랑의 희미한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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