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함으로 불러보리라(황동규, 「즐거운 편지」)
[ 아리칼럼 ]
사소함으로 불러보리라
- 황동규, 「즐거운 편지」 -
“생일 선물 받고 싶은 것 있어?”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그런데 정인은 “다른 건 필요 없고 편지 한 통이면 된다.”고 말한다. 그날 밤 우체통에 편지가 없어서 실망하려던 찰나, 남편 환유가 등장하여 멋지게 편지를 읽어준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이하생략)” 국문학과 대학생인 정인은 살짝 핀잔을 주면서도 행복해한다. 왜냐하면 이는 환유가 직접 쓴 편지가 아니라, 사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라는 시였기 때문이다. 박신양(환유)과 故최진실(정인) 주연의 영화 ‘편지’(1997)의 한 장면이다. ‘편지’라는 영화에 「즐거운 편지」라는 명시의 등장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목은 ‘즐거운 편지’이다. 하지만 편지를 읽어 내려갈수록 침울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전혀 즐겁지 않다. 제목은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반어(irony)이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즐겁지 않다. 먼저 발신자는 한없이 기다린다. 도대체 누구를 그리 하염없이 기다릴까. 독자에게까지 그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황지우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에서 말했듯,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계속된 끝없는 그리움은 결코 즐겁지 않다. 다음으로 수신자는 이 편지를 받고 순간 기쁠 수 있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누군가 나를 이토록 그리며 좋아해준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라는 부분에서 의아해진다. 이 부분을 주목해보겠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이 부분은 이전까지의 한국 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말이다.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지 않는다. 사랑의 영원성을 배반한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보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라며 가시는 길에 사뿐히 밟고 가시라고 심지어 진달래꽃도 뿌려준다. 그리고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도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한다. 이 시들의 화자는 수동적인 존재로 상대방에 결정에 슬퍼하면서, 끝없는 사랑과 기다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즐거운 편지’의 화자는 다르다.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으며 약간 냉소적이라고 볼 수 있다. 황동규는 “6ㆍ25 사변을 겪고 난 상황을 보니까 ‘사랑은 영원하다’는 생각이 설 자리가 없더군요. 제가 ‘즐거운 편지’를 쓸 무렵은 환도(還都)해서 몇 년 되지 않은 삭막한 때였고, 프랑스에서 건너온 사르트르(J.P Sartre)류의 실존주의가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정된 사랑은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라고 시 창작 동기를 밝힌 적 있다. 즉, 사랑도 항상 선택을 수반한다는 생각이 담겨있다.
1연을 보면 화자는 계속 그대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대를 생각하는 일은 ‘사소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과 같다고 하는 부분을 통해 ‘은유’가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사소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대를 보잘것없이 작게 생각한다는 것일까. 아니다. 사소함은 익숙함의 또 다른 말이다. 익숙함에 속으면 안 되며, 익숙한 것이 바로 소중한 것이다. 사실 큰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이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매일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잠을 자고, 씻고 이런 일들은 사소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대는 마치 나의 일상과 같다는 의미이다. 다만 매일 반복됨으로 사소하게 ‘느껴질’뿐 결코 사소하지 않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해’ 왔다는 부분에서 역사성을 획득하며 화자의 진실한 마음을 알 수 있다.
2연을 보면 화자는 이 사랑이 언젠가 그칠 수 있지만 그래도 아예 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사랑도 어디쯤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고 한다. ‘눈의 멈춤’은 ‘사랑의 멈춤’의 비유이다. 그러나 화자가 마지막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는 부분에서 이 사랑의 온도가 변할 수는 있지만 자연현상처럼 계속 이어짐을 암시한다. 또한 화자는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랑을 기다림으로 치환 시킨다. 기다림으로 당신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말에서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말하기까지의 고뇌와 외로움이 연상이 됐기 때문이다. 기다림이 승화되어 사랑이 되었다.
황동규는 사랑 노래를 많이 불렀다. <조그만 사랑 노래〉,<더 조그만 사랑 노래>, 〈비린 사랑 노래〉,〈쨍한 사랑 노래〉,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를 불렀다. 이 중에 앞의 두 시만 중점적으로 보겠다. <즐거운 편지>에서 화자는 혼자 벙어리 냉가슴 앓듯 홀로 사랑하고 홀로 기다렸다. <조금만 사랑 노래>와 <더 조그만 사랑 노래>로 갈수록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이 세 개의 시를 연결시켜 보고자 한다. <조그만 사랑 노래>에서는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고 화자는 독백한다.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나 떠다니는 ‘눈’의 심상이 안주하지 못하는 화자의 의식을 대변한다. <더 조금만 사랑 노래>에서는 ‘그대를 스치는 물방울’이라는 말이 나온다. 말도 못 하더니, 홀로 사랑한다 중얼거리더니, 이제는 그대에게 가서 닿았다! ‘눈’은 ‘물방울’의 심상으로 변화됨으로써 ‘그대’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화자의 바람을 보여준다.
시인은 고등학생이었다. 황동규 시인이 고등학생일 때 연상의 대학생 누나를 사모하여 쓴 시가 바로 ‘즐거운 편지’라고 한다. 그 나이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감성이 참 어여쁘게 느껴진다.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그저 바라만 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던 그 나이. 세월이 흐를수록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도,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도 패턴이 생겨서 능숙해진 게 아닐지 모르겠다. 게다가 보통 상대방의 반응이 생각보다 느리거나 별로 진척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버린다. 그대가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며, 오랫동안 전해 오던 사소함으로 과연 계속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짝사랑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기다림을 ‘즐겁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대단한 경지일 것이다. 필자도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고 싶다. 그럴 수 있는 그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는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즐거운 편지를 써서 나의 그대에게 보내리라.